스며드는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에게 물들어 하나의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인 미술관 옆 동물원.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여자와 사랑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철수의 이야기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언제 사랑에 빠졌나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순간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연인들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사랑했어요'라는 말보다 '어느 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고 있더라고요'라는 말에 더 많이 공감할 것이다. 물들어버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기록한다.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대사 한 줄을 남긴다.'사랑이라는 게'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건 줄 알았지. 서서히 물 들어 버릴 수 있는 건 줄은 몰랐어'.
미술관이 아닌 동물원으로
짝사랑을 하고 있는 '춘희'의 집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군인 '철수'가 찾아온다. '철수'의 여자 친구는 이사 간 후 연락이 두절되어 어쩌다 보니 '철수'와 '춘희'는 함께 살게 된다. '철수'를 집에서 내보내기 위해 여자 친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춘희'. 하지만 춘희의 눈앞에서 철수의 여자 친구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한다며 철수를 차 버린다.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가는 철수와 춘희. 미술관과 동물원의 갈림길에서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은 다른 선택을 한다. 춘희는 미술관으로 가고 철수는 동물원으로 간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다른 성격과 취향, 가치관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춘희가 좋아하는 시에서도 두 사람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짝사랑만 해 본 춘희에게는 사랑은 배려라는 이 시가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이별을 경험한 철수에게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 시는 자신의 아픔이 두배로 느껴지게 만든다. 사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극명하게 갈린다. 사랑은 처음부터 사랑으로 와서 영원하다는 춘희와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철수. 철수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춘희를 도와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작업을 돕는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생활 리듬, 취미, 취향, 성격임을 깨닫는다. 비를 맞은 우산을 어디서 말려야 하는지부터 물을 컵에 따라서 마셔야 하는지까지 사소한 일상에서 다양한 문제로 부딪힌다. 철수의 많은 잔소리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 춘희. 화를 많이 내지만 꼼꼼하면서 세심한 철수와 톡톡 튀는 매력의 춘희는 많이 다르지만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런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도 서로를 생각하고 상대방이 했던 행동들을 따라 한다. 서서히 스며든 이 감정이 사랑임을 알게 되지만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두 사람. 둘은 영화를 보면서 각자 생각하던 이상형의 모습을 기대하지만 기대와 어긋나는 행동에 서로는 마음이 빗나간다. 두 가지 버전의 생일카드를 준비했던 철수는 마음을 담지 않은 카드를 춘희에게 전달하고 그 카드를 받은 춘희는 실망한다.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춘희는 철수에게 어설프게 표현하지만 철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춘희는 속상한 자신의 마음이 사랑임을 알게 되면서 이론과 실제 사랑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을 하게 되니 철수가 하던 잔소리를 모두 받아들이고 내숭을 부리는 춘희.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고 배려하고자 노력하는 철수. 서로는 서로에게 배려하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실망하는 시간이 쌓여간다.
어느 날, 빨간색도 잘 어울린다는 철수의 말에 빨간색 코트를 입고 싱글벙글 웃는 춘희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로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쪽지를 남기고 떠난 철수를 찾으러 간 미술 간과 동물원의 갈림길. 미술관을 좋아하던 춘희는 철수가 좋아하는 동물원으로 간다. 하지만 철수는 춘희가 좋아하는 미술관에 있다. 둘은 갈림길에서 다시 마주하고 철수가 용기 내어 춘희에게 입맞춤을 한다. 설렘과 쑥스러움까지 다양한 춘희의 표정이 사랑스럽다.
사랑을 규정하지 않는 것
영화 초반에 춘희는 손으로 네모를 만들어 세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하면 다 의미가 있어 보여'라는 말을 한다. 이러한 춘희를 이상하게 봤던 철수는 어느 순간부터 똑같이 네모를 만들어 세상을 바라본다. 흰색과 검은색처럼 달랐던 두 사람이 섞여 회색이 되는 순간이다. 추상적인 사랑을 원하는 춘희와 구체적인 사랑을 원하는 철수는 결국은 같은 사랑을 원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사랑을 원한다는 것을 규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첫사랑과 첫 이별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첫사랑은 순수한 춘희이고 나의 첫 이별은 현실적인 철수이다. 네모 밖에서 사랑을 바라보는 춘희에게는 모든 사랑이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네모 속으로 들어가 사랑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이별에 아파하는 철수가 있다. 운명적인 사랑을 기대하던 모습과 이별을 겪고 고통스러워했던 과거의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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